16일 오후 1시 YTN 뉴스 생방송 도중 YTN 직원들이 든 피켓이 그대로 케이블을 타고 전국에 방송됐다. 순간 얼마전에 <독설닷컴>에서 본
YTN의 황모 기자에 대한 글이 생각나, 다시 읽어보았다. 휴가를 쪼개 언론자유를 염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1971년 봄이 떠올랐다. 책장의 책들을 들춰보았다. (참, 특종기자는 오보도 많이 한다더니, <독설닷컴>은 후배를 거느리며 활약하는 1진 기자를 '막내기자'라고 잘못 보도했다. ㅋ)
글은 총 3개다. 이 글들이 쓰여진 시간은 1971년 봄, 장소는 대개 세종로 사거리이다.
1971년 봄은 엄혹하던 박정희 시대. 71년 4월 27일에는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후보 사이의 경쟁은 꽤 치열했다. 이에 앞서 박정희는 1969년 9월 국회 날치기 통과로 상정한 '3선 개헌안'(6차 개정헌법)을 국민투표에 붙여 통과시키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3선 도전에 집착했다.
대통령 선거를 반년 앞둔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全泰壹) 열사가 평화시장 등 3개 시장내 7600여 명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면서 자기 몸을 불살랐다. 그러나 언론은 이 사건을 한두 번 짧게 보도했고 한두 신문에서 아주 피상적인 사설로 다뤘다.
"뭔가 아니다"라는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이듬해 3월 26일, 세종로의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온 서울대생 50여명은 언론화형식을 벌이면서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낭독한다.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
우리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이 쓰러져가는 민주의 파수대 앞에 모였다.
나오라, 사이비 언론인들이여 나오라. 이 민주의 광장으로 나와 국민, 선배에게 속죄하라. 선배투사의 한서린 해골 뒤에 눌러앉아 대중을 우민화하고 오도하여 얻은 그 허울좋은 대가로 안일과 축제를 일삼는 자들이여 나오라! 사이비 언론 뒤에 도사린 정보원이라는 이름의 제 6적이여. 나오라. 민주정신의 혈액을 빨아먹는 흡혈귀여!
안타깝다. 그 자리, 그 건물이건만 민주투사는 간곳 없고 잡귀만 들끓는가. 사자의 위용은 어디가고 도적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이 되었는가. 이것이 일컬어 제 7적이런가. 정치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 감아주고, 문화기사는 판매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면 더 이상 무엇을 쓰겠다는 것인가. 듣건대 일선기자의 고생스런 취재는 겁먹고 배부른 부차장 선에서 잘리기 일쑤고, 힘들게 부차장 손을 벗어나면 편집국장 옆에서 중앙정보부원이 지면을 난도질하고 있다니 이것이 무슨 해괴한 굿거리인가. 통탄할 언론의 무기력과 타락은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객관적인 상황의 요구가 그렇기 때문만이 아니라 언론의 주체적 상황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스스로 움츠리고 스스로 썩고 있는 것이다. 홍두깨 맞은 놈 젓가락만 보고도 도망하는 꼴 아닌가. 엄밀한 의미에서 강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옳았다. 동아야 너도 보는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만 가는 조선의 저 추잡한 껍데기를. 너마저 저처럼 전락하려는가. 동아야 너도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는가. 우리는 신문 경영자가 이미 정상배로 전락했음을 단정하고, 또한 신문을 출세의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가짜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닥 양심을 지니고 고민하는 언론인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으며 그들에게 호소한다. 신문은 이미 인적(人的)으로 동일체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엄연한 대립관계가 존재함을 직시하고 과감히 편집권 독립투쟁에 나서라.
70년대 중반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신문기자들의 처우는 기가 막힐 정도로 열악했다. 초임기자의 월급은 갑근세 면세점 이하였고, 10년 경력의 부장급이 되어야 겨우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 대신에 그 당시 기자들은 '곤조'가 있었다. 대학생들의 경고장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사 기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한다.
언론자유 수호선언
자유언론의 일선 담당자인 우리는 오늘의 언론 위기가 한계상황에 이르렀음을 통감하고 민주주의의 기초인 언론자유가 어떤 압력이나 사술(詐術)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엄숙히 선언한다. 오늘의 언론이 진실의 발견과 공정한 보도라는 본연의 기능을 거의 거세당하고 만 것은 주로 외부로부터의 불법 부당한 제재와 간섭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돌이켜보면 자랑스러운 선배 언론인들은 숨 막히는 외족(外族)의 억압 아래서도 국민의 알 권리와 국민에게 알릴 의무를 떳떳이 싸워 지켰다. 그러나 우리는 수년래 강화된 온갖 형태의 박해로 자율의 의지를 앗긴 채 언론 부재, 언론 불신의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나왔다. 작게는 뉴스원의 봉쇄로부터 기사의 경중과 보도 여부에까지 외부의 손길이 미쳤고, 이른바 정보기관원의 상주(常駐)가 빚어내는 모든 불합리한 사태는 일선 언론인인 우리들에게 치욕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이에 우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가 어떤 구실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회복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아울러 우리는 오늘의 언론 위기의 책임을 전적으로 외부로만 전가하려 하지 않으며 권리 위에 잠잔 스스로의 게으름을 반성하려 한다.
1. 우리는 기자적 양심에 따라 진실을 진실대로 자유롭게 보도한다.
2. 우리는 외부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을 일치단결하여 배격한다.
3. 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걸고 정보요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한다.
1971. 4. 15.
동아일보 기자 일동
언론자유선언문
민주언론의 선봉이며 중추인 우리 조선일보 기자들은 우리 언론 사상 가장 불행한 시기에 언론의 일선을 맡았음을 절감한다. 우리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할 신성한 사명이 외부로부터의 지나친 간섭에 의해 민족지로서의 전통을 더이상 이어갈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직시하고 이를 타개할 것을 선언한다.
지난 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파동 이래 신문제작상의 제약이 가중되어 왔으며 최근의 학생데모에서는 일선 취재까지 위축받아야 할 중대한 사태에 직면하였다.
취재기자가 학생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받을 만큼 언론이 극단적인 불신의 대상이 되어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정당한 취재활동을 하던 기자가 기관원으로부터 폭행을 당해도 그 책임이 규명되지 못했으며 정보기관원이 편집국을 수시로 출입, 신문제작에 굴욕적인 압력을 가해도 이를 배격하지 못한 언론의 무기력을 자괴하고 이제 우리는 언론본연의 자세를 되찾기 위해 새출발하려 한다.
우리는 이 모든 책임을 경영주나 외부적인 요인에만 돌리려고는 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들의 모임은 결단코 현실체제의 부정이 아니라 스스로 언론현상을 광정,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임을 자부한다. 우리들의 각성과 선투가 곧 선배언론인들에 대한 보답일 뿐더러 민권의 보루로서 후선들에게 연면(連緬)하게 전통을 이어줄 우리 세대의 당연한 책무임을 깨달은 결과이다. 우리의 정당한 주장은 어떠한 회유나 강압에도 꺾일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기본권을 찾을 때까지 모든 언론의 적과 끝까지 투쟁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결의문
1. 우리는 민주한국의 언론인으로서의 긍지를 되찾아 원천적인 강압을 배격한다.
1. 우리는 기자를 함부로 연행, 감금, 구타하는 등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행위와 정보기관원의 사내 항시 출입과 같은 부당한 간섭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다.
1. 우리는 보도할 가치가 있는 모든 뉴스를 사실대로 알릴 것을 다짐한다.
1. 우리는 언론불신의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도 있음을 깨닫고 앞으로 언론인의 품위를 지켜 사명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
1971. 4. 17.
조선일보사 기자 일동
그 이후 결과는 어땠을까? 조선일보 기자들의 성명서가 발표되고 정확히 열흘 뒤인 4월 27일, 국민직접선거로 치러진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53.2%를 득표해 47.3%를 득표한 2위 김대중 후보를 따돌리고 3선 대통령이 됐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목표로 유신(維新)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민주주의 제도를 정지시키는 비상조치를 발표했다. 깜깜한 암흑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1975년 3월 다시 '자유언론'의 기치를 들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1년 봄을 생각했다. 그리고 현재 또 다시 '자유언론'을 꿈꾸는 기자들은 1975년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를 떠올리고 있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된다.